웨더 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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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웨더 리포트는 1970년부터 1986년까지 활동한 미국의 재즈 퓨전 밴드이다. 조 자비눌과 웨인 쇼터를 중심으로 결성되었으며, 16년 동안 재즈를 기반으로 다양한 장르를 융합한 음악을 선보였다. 밴드는 여러 차례 멤버 교체를 겪었으며, 특히 자코 파스토리우스가 참여한 시기에 전성기를 맞았다. 웨더 리포트는 6번의 그래미상 후보 지명 중 1번의 수상을 기록했으며, 1986년 해체 이후에도 앨범과 라이브 공연이 발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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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더 리포트 - [음악 그룹]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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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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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성지 | 미국 뉴욕주 뉴욕 |
활동 기간 | 1970년 – 1986년 |
장르 | 재즈 퓨전 재즈 펑크 |
레이블 | 컬럼비아 ARC |
관련 활동 | 마일스 데이비스 캐넌볼 애덜리 조니 미첼 |
이전 멤버 | |
멤버 | 조 자비눌 웨인 쇼터 자코 파스토리우스 미로슬라브 비토우스 알폰스 무존 돈 에일리어스 아이르투 모레이라 무루가 부커 돔 움 로메오 에릭 그라바트 그레그 에리코 알폰소 존슨 레온 "Ndugu" 챈클러 나라다 마이클 월든 체스터 톰슨 알렉스 아쿠냐 마놀로 바드레나 피터 어스킨 로버트 토머스 주니어 오마르 하킴 빅터 베일리 미노 시네루 스티브 갯 토니 윌리엄스 앤드루 화이트 |
웹사이트 | |
공식 웹사이트 | weatherreportmusic.com |
2. 역사
웨더 리포트는 1970년 조 자비눌과 웨인 쇼터, 미로슬라프 비투스를 중심으로 결성되었다.[1] 자비눌과 쇼터는 1959년 메이너드 퍼거슨의 빅 밴드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고, 이후 각각 캐논볼 애덜리와 아트 블래키의 밴드에서 활동하며 마일스 데이비스의 초기 퓨전 앨범인 ''In a Silent Way''와 ''Bitches Brew''에 참여했다.[1] 이들은 더 개성적인 음악을 추구하기 위해 웨더 리포트를 결성했다.[3]
밴드 결성에 대해서는 자비눌과 비투스의 주장이 엇갈리는데, 자비눌은 자신과 쇼터가 비투스를 영입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비투스는 자신과 쇼터가 먼저 밴드를 결성하고 자비눌을 데려왔다고 주장한다.[4]
초기 멤버는 알퐁스 무존(드럼), 아이르토 모레이라(타악기), 돈 앨리어스(타악기), 돈 운 로만(타악기), 바바라 버튼(타악기) 등이었다.[1] 기타리스트 존 맥러플린도 밴드에 초대받았지만, 솔로 활동을 위해 거절했다.
1970년에 발표된 데뷔 앨범 웨더 리포트는 다운 비트지에서 '올해의 앨범'으로 선정될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이 앨범은 신시사이저를 사용하지 않고 어쿠스틱 악기 위주로 구성되어 비교적 부드러운 사운드를 들려준다. 두 번째 앨범 아이 싱 더 바디 일렉트릭부터는 신시사이저와 음향 효과가 적극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일본 공연 실황도 포함되었다.
1973년, 조 자비눌의 주도로 밴드는 재즈 펑크와 R&B의 영향을 받아 그루브 지향적인 음악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미로슬라프 비토우시와 자비눌 사이에 음악적 견해 차이가 발생했고, 결국 비토우시가 밴드를 떠나게 되었다. 비토우시는 자비눌이 상업적 성공에만 관심이 있는 "일류 조작자"였다고 비난했다.[10][11] 웨인 쇼터는 자비눌의 편을 들었고, 비토우시의 후임으로 알폰소 존슨이 영입되었다.
1975년에 발매된 ''Tale Spinnin''' 앨범에서는 신시사이저 기술의 발전이 더욱 두드러졌다. 같은 해 쇼터는 밀턴 나시멘투와 함께 ''Native Dancer''를 녹음했다. ''Tale Spinnin''은 DownBeat 최고의 앨범 상을 수상했고, ''Native Dancer''는 준우승을 차지했다.
1976년, 자코 파스토리우스가 알폰소 존슨의 후임으로 밴드에 합류하면서 웨더 리포트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파스토리우스는 뛰어난 연주 실력과 작곡 능력, 무대 매너로 밴드의 인기를 크게 높였다.
1977년 앨범 《Heavy Weather》는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수록곡 "Birdland"는 재즈 스탠다드가 되었다. 이 시기 파스토리우스는 조니 미첼과도 협력하며 활동 범위를 넓혔다.
1978년, 모리스 화이트의 레이블 ARC로 이적한 후 발표한 《Mr. Gone》은 다운비트로부터 혹평을 받았지만, 빌보드 재즈 앨범 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다.[15] 이 앨범에는 피터 어스킨이 드럼으로 참여했고, 이후 정식 멤버가 되었다.
1979년, 웨더 리포트는 쿠바 하바나에서 열린 하바나 잼 페스티벌에 참여했다. 이는 미국과 쿠바의 정치적 긴장 완화에 기여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1980년, 로버트 토마스 주니어가 타악기 연주자로 합류했고, 《나이트 패시지》 앨범에 참여했다. 이 앨범은 비밥의 요소를 도입하고 듀크 엘링턴의 "락킨 인 리듬"을 커버하는 등 재즈의 전통을 엿볼 수 있게 했다.
1980년대 초, 파스토리우스의 정신 건강 문제와 약물 남용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밴드 활동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1982년 앨범 《웨더 리포트》는 조 자비눌의 영향력이 더욱 커진 작품으로, 즉흥 연주보다는 악보에 의한 연주가 주를 이루었다.
1982년, 오마르 하킴(드럼), 빅터 베일리(베이스), 호세 로시(타악기)가 새 멤버로 영입되었다. 이들은 1983년 앨범 ''Procession''과 1984년 앨범 ''Domino Theory''에 참여했다.
1984년, 미노 시넬루가 로시를 대신하여 타악기 연주자로 합류했고, 1985년 앨범 ''Sportin' Life''에 참여했다. 이 앨범에는 마빈 게이의 "What's Going On" 커버 버전이 수록되었다.
1986년, 웨인 쇼터가 솔로 활동을 위해 밴드를 떠났고, 조 자비눌은 밴드 해체를 결정했다. 웨더 리포트의 마지막 앨범 ''This is This!''는 1986년에 발매되었으며, 카를로스 산타나가 기타 연주자로 참여했다.
해체 이후, 2002년에는 미공개 라이브 음원을 모은 ''라이브 앤 언릴리즈드''가 발매되었고, 2006년에는 박스 세트 ''Forecast: Tomorrow''가 발매되었다. 2011년에는 1975년, 1978년, 1983년 라이브 공연 실황을 담은 앨범들이 발매되었다.
2. 1. 결성 (1970-1973)
조 자비눌과 웨인 쇼터는 1959년 메이너드 퍼거슨의 빅 밴드에서 연주하며 처음 만나 친구가 되었다.[1] 자비눌은 1960년대에 캐논볼 애덜리의 그룹에서 활동했고, 쇼터는 아트 블래키의 재즈 메신저스에 합류한 후, 1964년에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두 번째 위대한 퀸텟에 합류했다. 이 10년 동안, 두 사람은 재즈 최고의 작곡가 중 한 명으로 명성을 얻었다.자비눌은 나중에 쇼터와 함께 마일스 데이비스의 초기 퓨전 음악 레코딩에 참여했고, 두 사람 모두 데이비스의 주요 앨범인 ''In a Silent Way''(1969)와 ''Bitches Brew''(1970)를 녹음한 스튜디오 그룹의 일원이었다.[1] 웨더 리포트는 처음에는 더 인상적이고 개성적인 음악을 탐구하기 위해 결성되었다(자비눌의 말처럼 "8마디 셔츠에서 벗어나 브릿지로 가는 것"과 같았다).[3]
웨더 리포트가 처음 어떻게 결성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쟁이 있다. 자비눌에 따르면, 그와 쇼터가 다른 마일스 데이비스의 동료이자, 클래식 음악을 전공한 체코 출신 베이시스트 미로슬라프 비투스를 영입하면서 시작되었다. 비투스는 이전에 그들과 개별적으로 (그리고 허비 맨, 밥 브룩마이어, 스탄 게츠, 칙 코리아) 함께 연주했었다. 비투스 본인에 따르면, 실제로 웨더 리포트를 결성한 것은 그와 쇼터였고, 쇼터가 나중에 자비눌을 데려왔다고 한다.[4] 어느 이야기가 사실이든, 이 세 명의 음악가(모두 작곡가)가 프로젝트의 초기 핵심을 형성했다.
밴드를 완성하기 위해 자비눌, 쇼터, 비투스는 맥코이 타이너의 전 드러머 알퐁스 무존을 영입했고, 정규직 보조 타악 연주자를 찾으면서 데뷔 앨범 녹음을 시작했다.[1] 초기 영입된 멤버는 세션 타악 연주자 돈 앨리어스와 교향악단 타악 연주자 바바라 버튼이었다. 녹음 과정에서 앨리어스는 자비눌과 다퉜고(자비눌이 타악 접근 방식에 대해 너무 독재적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혁신적인 브라질 타악 연주자 아이르토 모레이라(또 다른 데이비스 출신)가 음반을 완성하기 위해 투입되었다. 기타리스트 존 맥러플린도 그룹에 합류하라는 초대를 받았지만, 대신 솔로 경력을 추구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1970년에 웨더 리포트는 알폰스 무존, 아이르토 모레이라, 돈 운 로만, 미로슬라프 비투스를 영입하여 결성되었다. 초기의 작품은 마일스 데이비스의 『비치스 브루』의 연장선상에 있었고, 그것을 의식한 사운드였다. 데뷔 앨범인 『웨더 리포트』는 어쿠스틱 베이스와 생악기가 주를 이루며 신시사이저는 아직 사용하지 않았고, 이후의 작품에 비해 소프트한 사운드를 들을 수 있는 작품으로, 『다운 비트』지에서는 1971년 "앨범 오브 더 이어"의 영예를 안는 등, 주목을 받은 작품이 되었다. 두 번째 앨범인 『아이 싱 더 바디 일렉트릭』부터는 신시사이저와 사운드 이펙트류가 다용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앨범의 일부분에는 일본 공연 당시의 라이브 연주 테이크가 사용되었고, 후에 2장짜리 『라이브 인 도쿄』로도 일본 공연 당시의 음원이 발매되게 되었다.
2. 2. 펑크/그루브 도입과 변화 (1973-1975)
1973년 앨범 《Sweetnighter》에서 웨더 리포트는 주로 어쿠스틱한 그룹 즉흥 연주 형식을 버리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주로 조 자비눌의 주도로 웨더 리포트는 재즈 펑크와 그루브 지향적으로 변모하여 R&B의 영향을 더욱 강하게 받아 빽빽한 일렉트릭 키보드 연주를 사용했으며, 미리 쓰여진 부분과 즉흥 연주 부분 모두에 더 많은 구조를 더했다.이 시점에서 미로슬라프 비토우시와 자비눌은 창작적인 의견 차이로 갈등을 겪게 되었는데, 전자는 웨더 리포트의 원래 접근 방식을 선호했고 후자는 펑크의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자비눌은 회고적으로 비토우시가 펑크를 설득력 있게 연주할 수 없다고 비난했으며(그렉 에리코가 이를 뒷받침함) 밴드를 위해 충분한 음악을 제공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비토우시는 실제로 작곡을 가져왔지만 자비눌이 그것을 연주할 수 없었다고 반박했다. 비토우시는 또한 자비눌이 상업적 성공에 주로 관심이 있는 "일류 조작자"였다고 비난했다.[10][11]
웨인 쇼터가 자비눌의 편을 들면서 원래의 3인 파트너십은 격렬하게 해체되었고 비토우시는 웨더 리포트를 떠났다. 비토우시의 대체자는 필라델피아 출신의 일렉트릭 베이스 기타리스트 알폰소 존슨(이전에는 팝 퓨전 연주자 척 맨지오네의 사이드맨)이었다. 쇼터가 영입한 존슨은 자비눌이 원했던 펑크 요소를 제공할 수 있는 유연한 연주자였다.
1975년에 새 앨범 ''Tale Spinnin'''이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신시사이저의 기술적 발전을 더욱 활용하여 거대한 스튜디오 기반 TONTO 어레이를 사용하기도 했다. 같은 해에 쇼터는 밀턴 나시멘투와 함께 자신의 이름으로 ''Native Dancer''를 녹음했다. ''Tale Spinnin''은 1975년 ''DownBeat'' 최고의 앨범 상을 수상했고(세 번째 웨더 리포트 앨범), ''Native Dancer''는 준우승을 차지했다.
《스위트 나이터》 시기부터 웨더 리포트의 사운드에 펑크 그루브의 요소가 도입되기 시작했고, 미로슬라프 비토우스도 어쿠스틱 베이스 외에 일렉트릭 베이스도 자주 사용하게 되었으며, 곡에 따라서는 즉흥 연주 섹션이 되면 곡 중간에 일렉트릭 베이스로 바꿔 연주하는 등, 한 곡 안에서도 다채로운 사운드를 요구하게 되었다. 웨인 쇼터는 이전에 자신의 앨범 《논 스톱 홈》의 마지막 곡에서 척 맨지오니 그룹에 있었고 프렛리스 일렉트릭 베이스를 연주하던 알폰소 존슨을 참여시킨 적이 있었는데, 그 베이스 사운드를 웨더 리포트에서도 활용하고 싶다고 생각하여 그를 웨더 리포트에 영입하기로 했다.
2. 3. 자코 파스토리우스 시대와 전성기 (1976-1982)
1976년 앨범 《블랙 마켓》은 밴드가 제작한 작품 중 가장 록 지향적인 작품이었다.[1] 웨더 리포트의 음악은 즉흥적인 펑크 잼에서 멜로디 중심의 간결한 형태로 더욱 발전하여 대중적인 매력을 더했다. 조 자비눌은 키보드 신시사이저 사용을 더욱 강화했고, 웨인 쇼터는 초창기 형태의 윈드 신시사이저인 리리콘을 실험했다.이 앨범은 잦은 멤버 교체 시기에 녹음되었다. 알폰소 존슨은 잦은 드러머 교체로 인한 리듬의 부담에 지쳐 《블랙 마켓》 녹음 중간에 활동을 중단하고 빌리 코밤/조지 듀크 밴드에서 연주하기로 결정했다. 존슨은 새 앨범의 모든 트랙에서 두 곡을 제외하고 연주했다. 그의 대체자는 플로리다 출신의 거장 프렛리스 베이스 기타리스트 자코 파스토리우스였는데, 그는 자비눌과 수년간 연락을 주고받았으며 "Cannonball"과 자신의 곡 "Barbary Coast"에서 연주하기 위해 합류했다.
새로운 드러머 체스터 톰슨이 친구 존슨과 함께 떠날 것이라고 생각한 자비눌과 쇼터는 두 번째 세션에서 파스토리우스의 추천으로 전 마하비슈누 오케스트라 드러머 나르다 마이클 월든으로 교체했다. 월든은 여러 앨범 트랙에서 연주했지만 결국 부적합한 것으로 드러났다. 톰슨은 마지막 《블랙 마켓》 세션에 다시 참여했지만 파스토리우스와 리듬 섹션으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다시 떠났다. 톰슨은 이후 제네시스의 투어 드러머로 합류했다.
《블랙 마켓》은 웨더 리포트의 지속적인 성공을 이어갔으며,[1] 판매량도 좋았고, 잡지 《다운비트》가 선정한 올해의 앨범 상을 받은 밴드의 네 번째 앨범이 되었다. 그 후의 투어에서 알렉스 아쿠냐는 퍼커션에서 드럼 키트로 옮겨갔고, 돈 앨리어스는 어린 푸에르토리코 퍼커션 연주자 마놀로 바드레나로 교체되었다. 이 밴드는 7월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 1976년에 매우 호평을 받은 공연을 펼쳤으며, 이 공연은 추후 발매를 위해 촬영되었다.
자코 파스토리우스의 영입은 웨더 리포트가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데 기여했다. 파스토리우스는 베이스에 매우 음악적이고 멜로디컬한 면모를 불어넣었다. 그는 R&B나 펑크의 영향을 받은 그루브 라인을 연주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음색과 현 하모닉스에 대한 솔로 컨트롤을 보여주었다. 파스토리우스는 멀티 악기 연주자였으며(최신 녹음 세션에 드럼, 스틸 팬, 만돌첼로 기여), 뛰어난 작곡가("틴 타운"과 "세 개의 비밀의 시선" 등)였고, 녹음 스튜디오와 기술에 대한 지식 덕분에 자비눌에게 유용한 프로듀싱 도구였다. 파스토리우스의 무대 연출과 공격적인 쇼맨십은 밴드가 새로운 관객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밴드의 다음 앨범은 1977년 발표된 호평을 받은 《Heavy Weather》로, 판매량 면에서 밴드의 가장 성공적인 음반임과 동시에 평단의 광범위한 찬사를 받았다. 이 앨범에는 밴드의 가장 큰 히트곡인 "Birdland"가 수록되었는데, 이 곡은 팝 히트곡이 되었고 이후 재즈 스탠다드가 되었다. 웨더 리포트는 버트 슈거먼이 제작한 시리즈 《The Midnight Special》에 출연하여 "Birdland"와 "틴 타운"을 모두 연주했다. 《헤비 웨더》는 웨더 리포트의 수상 기록을 이어가며, 마지막 다운비트 올해의 앨범상을 수상했다.
이 시기에 파스토리우스는 조니 미첼과 강한 직업적 관계를 맺고 있었고(그는 1970년대 후반 내내 그녀의 베이시스트로 활동), 이는 또 다른 음악적 연결로 이어졌다. 그 후 몇 년 동안 미첼은 웨더 리포트 라인업을 ''전원'' 고용하여(각 경우에 자비눌은 제외) 그녀의 스튜디오 앨범 《돈 주앙의 무모한 딸》(1977)과 《Mingus》(1979)에 참여시켰다.
1978년 8월, 밴드는 모리스 화이트의 개인 레이블 ARC에 컬럼비아 레코드로 합류했다.[14] 당시 그들은 풀타임 드러머와 타악기 연주자가 다시 없었는데, 알렉스 아쿠냐는 스튜디오 뮤지션으로 경력을 쌓기 위해 라스베이거스로 돌아갔고, 마놀로 바드레나는 "비음악적인 이유"로 해고되었다.
웨더 리포트의 계약과 작업 일정에 따라 또 다른 앨범이 필요했고, 자비눌의 솔로 작업은 웨더 리포트의 여덟 번째 앨범인 《Mr. Gone》(1978)에 흡수되었다. 스튜디오 세션에는 다양한 드러머가 참여했는데, 파스토리우스는 두 곡에서 드럼 키트를 연주했고, 토니 윌리엄스, 스티브 개드, 피터 어스킨이 추가로 참여했다(후자는 파스토리우스가 프로젝트에 영입). 어스킨은 다음 투어부터 밴드의 정식 멤버가 되었고 1982년까지 웨더 리포트와 함께했다. 이 앨범에는 데니즈 윌리엄스와 지구, 바람, 불의 리더 모리스 화이트가 게스트로 참여했다. 이 앨범은 빌보드 재즈 앨범 차트에서 1위에 올랐다.[15]
《미스터 곤》은 《다운비트》로부터 별 한 개짜리 리뷰 평점을 받았다. 그룹은 잡지와 반박 인터뷰를 준비하여 그들의 노력을 옹호했다.
70년대 후반에 이르러 웨더 리포트는 자비눌, 쇼터, 파스토리우스, 어스킨의 4인조가 되었고, 처음으로 보조 타악기 연주자를 없앴다. 대신, 네 명의 멤버 모두 라이브 공연에서 다양한 시점에 타악기를 연주했다. 자비눌은 이보다 더 세련되고 덜 복잡한 사운드가 더 많은 청취 범위를 제공한다고 말했다.[16][17]
밴드의 투어는 멀티미디어 연출(무대 스태프, 레이저 및 영화 프로젝션 포함)은 재즈계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록 스타 수준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1979년 더블 라이브 앨범 《8:30》(그 해의 최우수 재즈 퓨전 퍼포먼스 수상)은 《미스터 곤》 투어에서 녹음되었으며 이 웨더 리포트 라인업의 힘과 에너지를 포착했다. 자비눌은 나중에 이 라인업을 "역대 최고의 밴드 중 하나! 그 밴드는 정말 대단했어!"라고 묘사했다.[18]
1979년 3월 2일부터 4일까지 웨더 리포트는 쿠바 하바나로 건너가 역사적인 하바나 잼 페스티벌에 참여했는데, 이는 미국과 쿠바의 정치적 적대감에 대한 휴식으로, 여러 미국, 쿠바 아티스트들이 함께 공연했다.
1980년 초, 파스토리우스는 핸드 드러머 로버트 토마스 주니어를 밴드에 영입했다. 토마스는 1980년 앨범 《나이트 패시지》에 참여했다. 이 음반은 쇼터의 역할을 더 부각시켰으며, 비밥의 강력한 요소와 듀크 엘링턴의 "락킨 인 리듬"을 고속으로 커버하여 재즈의 황금기를 엿볼 수 있게 했다.
파스토리우스는 정신 불안정 및 약물 남용의 징후를 보였다. 그해 말, 파스토리우스는 뉴욕에서 오랫동안 지연된 그의 두 번째 솔로 앨범(''워드 오브 마우스'') (1981) 작업을 시작했고, 자윈울은 캘리포니아에서 새로운 웨더 리포트 자료를 작업했다.
웨더 리포트의 다음 앨범 《웨더 리포트》 (1982)는 1981년에 녹음되었지만, 1년 더 지나서야 발매되었다. 이 앨범에서 자윈울은 연주자이자 작곡가(그리고 그룹 디렉터)로서의 지배력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냈다. 점점 더 밴드의 음악은 즉흥 연주보다는 악보로 작성되었다. 동시에 파스토리우스는 그의 《워드 오브 마우스》 프로젝트에 더 많은 창작력을 쏟았다. 그는 웨더 리포트 앨범을 위해 그룹이 작곡한 단 하나의 곡에만 참여했다. 쇼터는 "오랫동안 웨더 리포트에서 저는 자제했습니다. 저는 어떤 일들을 하지 않기로 선택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어스킨의 《워드 오브 마우스》에 대한 헌신은 그의 역할 또한 교체되어야 함을 의미했다. 동시에 로버트 토마스 주니어는 밴드를 떠났다. 듀오로 축소되고 투어 일정이 다가오면서, 자윈울과 쇼터는 새로운 밴드를 서둘러 구성해야 했다.
1976년 앨범 블랙 마켓 제작 후반부터 자코 파스토리우스가 참여하여, "버버리 코스트"를 제공했다. 《블랙 마켓》에서는 퍼커셔니스트 체스터 톰슨을 대신하여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마놀로 바드레나를 영입했고, 알렉스 아쿠냐가 드러머가 되었다. 1976년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 출연 등을 포함하여, 웨더 리포트는 정점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1977년 앨범 헤비 웨더에서는 자코의 베이스 솔로와 드럼 연주가 폭발하는 "틴 타운"이 수록되었고, "버드랜드"에서는 베이스로 피킹 하모닉스 등의 참신한 기법으로 리프를 연주하는 등, 팝적인 사운드는 재즈 팬 외에도 퓨전 팬들에게까지 지지를 받게 되었다. 《헤비 웨더》 발매 후, 알렉스 아쿠냐와 마놀로 바드레나가 그룹을 떠나면서, 한때 멤버는 3명이 되었다. 1978년 앨범 미스터 곤에서는 피터 어스킨, 토니 윌리엄스, 스티브 개드 등이 참여했고, 앨범 사운드는 조 자비눌 색채가 강한 신스 사운드와 시퀀스가 많이 사용되었지만, 자코는 "펑크 재즈"라는 곡을 제공하며, 작곡가로서의 존재감도 서서히 드러내게 되었다.
피터 어스킨이 정식으로 합류하여 4인조가 된 웨더 리포트는 세계 각국으로 투어를 다니며 수많은 라이브를 소화하는 그룹이 되었다. 1979년에는 미국 공연 등에서 엄선된 테이크가 2장짜리 LP로 묶여 앨범 『8:30』에 수록되었으며, LP의 4면에는 최신 스튜디오 녹음이 수록되어 라이브 앨범과 스튜디오 앨범 간의 차이가 거의 없는 앙상블을 이루었다.
1979년 3월 2일부터 3월 4일까지 쿠바에서 개최된 하바나 잼(Havana Jam)에 출연했다. 이 행사에는 미국, 쿠바측 여러 아티스트들이 참여하여 공산권에서 개최된 최초의 공동 행사로서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웨더 리포트는 1976년부터 1981년까지 세계 각지의 대규모 재즈 페스티벌에 많이 참여했으며, 웨더 리포트가 출연하면 관객 동원 수가 급증하는 인기를 누렸다.
2. 4. 후기 (1982-1986)
미하우 우르비아크의 추천으로, 조 자비눌과 웨인 쇼터는 23세의 드러머 오마르 하킴을 영입했다.[19] 그는 마이크 메이니에리, 데이비드 보위, 칼리 사이먼 등 다양한 뮤지션들과 연주한 경력이 있는 세션 연주자이자 멀티 악기 연주자였다. 하킴은 즉시 새로운 라인업의 나머지 멤버들을 영입하는 임무를 맡았다. 마커스 밀러를 베이스 기타 연주자로 영입하는 데 실패한 후,[20] 버클리 음악 대학을 최근 졸업한 빅터 베일리를 선택했다. (하킴은 미리엄 마케바의 백 밴드에서 연주하면서 그와 함께 연주한 적이 있었다.) 하킴은 또한 Labelle에서 함께 활동했던 타악기/콘서트 연주자 호세 로시를 영입했다.새로운 웨더 리포트는 바로 투어에 돌입했다. 투어에서 발전된 음악은 1983년 앨범 ''Procession''에 녹음되었으며, 이 앨범은 1970년대 중반에 개척했던 "월드 뮤직" 접근 방식으로의 회귀를 보여주었고, 더 맨해튼 트랜스퍼가 카메오로 출연했다.[19]
같은 라인업으로 계속 활동하며, 웨더 리포트는 1984년 앨범 ''Domino Theory''를 녹음했는데, 하킴은 자코 파스토리우스의 예전 역할인 자비눌의 공동 프로듀서를 맡았다. 이 앨범은 웨더 리포트의 첫 번째 앨범으로, 드럼 머신과 샘플러(Emulator)를 사용하여 밴드의 최첨단 음악 기술 참여를 심화시켰으며, 칼 앤더슨의 게스트 보컬도 포함되었다.
타악기 연주자이자 가수인 미노 시넬루는 1984년 봄에 로시를 대신하여 합류했으며, 밴드의 비디오 릴리스 ''Live in Japan'' (2007년 DVD로 재발매)에 출연했다. 같은 라인업은 1985년 앨범 ''Sportin' Life''에서도 연주했는데, 여기에는 마빈 게이의 "What's Going On"의 커버 버전과 바비 맥퍼린과 칼 앤더슨의 출연이 포함되었다. 자비눌의 기술적 호기심에 발맞춰, 이 앨범은 MIDI의 등장을 알렸으며, 이를 통해 그는 일련의 신시사이저를 통해 빠르고 저렴하게 음악을 쓰고, 시연하고, 녹음할 수 있었다.
자비눌과 쇼터 모두 다른 프로젝트가 웨더 리포트 활동보다 더 만족스럽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고, 일반적으로 밴드가 수명을 다했다고 느꼈다.[1]
1986년 2월, ''샌디에고 유니언-트리뷴''은 쇼터가 솔로 활동에 집중하기 위해 밴드를 떠났다고 발표했다.[21] 쇼터와 밴드 이름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기로 마지못해 동의한 자비눌은 웨더 리포트를 해체했다. 웨더 리포트라는 이름으로 마지막 앨범인 ''This is This!''는 1986년 6월에 발매되었으며, 콜롬비아 레코드와의 계약을 이행했다. 앨범의 두 곡에는 카를로스 산타나의 기타 연주가 담겼으며, 하킴은 한 곡에만 참여하고, 피터 어스킨이 드럼으로 복귀했다.
2. 5. 해체 이후 (1986-현재)
2002년, 웨더 리포트의 더블 CD 앨범 ''라이브 앤 언릴리즈드''가 발매되었으며, 1970년대 후반/1980년대 초반에 다양한 멤버로 구성되어 녹음된 빈티지 라이브 녹음이 수록되었다. 2006년 9월, 콜롬비아/레거시는 웨더 리포트 박스 세트인 ''Forecast: Tomorrow''를 발매했다. 여기에는 주로 이전에 발매되었던 자료(1970년부터 1985년까지, ''This is This!'' 제외)로 구성된 3개의 CD와 이전에 공개되지 않았던 1978년 9월 28일 독일 오펜바흐 공연(에르스킨과 파스토리우스가 참여) 전체를 담은 DVD가 포함되어 있다. 1976년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 공연 DVD 영상(파스토리우스, 아쿠나, 바드레나가 참여한 헤비 웨더 라인업)도 공개되었다. 콜롬비아/레거시는 1984년 ''Live in Japan'' 콘서트 DVD도 재발매했다.2011년, 자비눌 재단은 독립 레이블과 협력하여 이전에 공개되지 않았던 웨더 리포트 라이브 쇼 40주년 기념 3부작을 발매했다. 3월에는 ''Live in Berlin 1975''가 바이닐과 CD/DVD 세트로 발매되었고, 6월에는 ''Live in Offenbach 1978'' DVD가 미공개 공연 전체를 담은 더블 CD와 함께 재발매되었으며, 10월에는 ''Live in Cologne 1983''이 DVD와 더블 CD로 발매되었다.
3. 음악 스타일
16년 동안 웨더 리포트는 재즈를 중심으로(프리 재즈 포함) 예술 음악, 민족 음악, R&B, 펑크, 록 등 다양한 영역의 음악을 탐구했다. 재즈 퓨전으로 분류되기도 했지만, 밴드 멤버들은 대체로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34]
웨더 리포트는 처음부터 정통 재즈의 "솔리스트/반주" 구분을 버리고, 모든 멤버가 지속적으로 즉흥 연주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알폰소 존슨이 밴드에 합류한 이후 콘서트에서 개별 솔로가 더욱 두드러졌지만, 집단적인 접근 방식을 압도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비치스 브루'' 시기와 유사한 즉흥 연주 방식을 보였으나,[1] 점차 그루브 지향적인 접근과 1977년 히트 싱글 "버드랜드"와 같이 중독성 강한 작곡으로 변화했다.
조 자비눌의 연주 스타일은 기발한 멜로디 즉흥 연주가 드물지만 리듬감 있는 빅 밴드 코드 또는 베이스 라인과 결합되어 지배적이었다. 그는 전기 피아노 연주자로 시작하여, 신시사이저의 역할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켰다. ARP, Oberheim과 같은 회사와 협력하여 전자 음색을 표현하고 패치하는 새로운 방식을 개발했다. 보코더를 사용하고, 신시사이저를 통해 연주된 소리(필터링 및 전치)를 녹음하여 재즈 하모닉스와 "노이즈"(그는 "세상이 생성하는 모든 소리 사용"이라고 언급)의 독특하고 아름다운 합성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자비눌이 신시사이저 편곡으로 사운드를 지배하게 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웨인 쇼터는 악기 연주자로서의 지배적인 역할로 명성을 얻고 그룹에 합류했으며,[1] 1960년대 솔로 작업과 마일스 데이비스의 "두 번째 위대한 5중주"에 대한 기여에서 비롯되었다. 웨더 리포트에서 그는 경제적이고 "경청"하는 스타일로 색소폰을 연주했다. 다른 멤버의 즉흥 연주에 반응하여 미묘한 화성적, 멜로디적, 그리고/또는 리듬적 복잡성을 더했다. 작곡가로서 그는 자비눌이나 파스토리우스가 쓴 곡의 때로는 화려한 멜로디즘과 반대되는 추상적이고 때로는 무조적이며 "프리 재즈" 스타일의 음악을 선택했다. 테너 및 소프라노 색소폰을 모두 연주하면서 콜트레인 등의 영향을 받아 소프라노 색소폰의 재즈에서의 역할을 발전시켰다.
웨더 리포트는 텍스처가 풍부한 사운드와 음악 기술 및 처리에 대한 발전에 지속적인 관심을 유지했다. 자비눌과 초대 베이시스트 미로슬라프 비투스는 전기 효과 페달(일반적으로 록 기타리스트가 사용)을 실험했으며, 자비눌은 전기 피아노와 신시사이저에, 비투스는 더블 베이스에 사용했다. 밴드의 세 번째 베이시스트 자코 파스토리우스는 프렛리스 베이스 기타의 사용, 멜로디 베이스 솔로 연주, 현 하모닉스의 광범위한 사용을 대중화했으며, 밴드의 음악에서 드라이빙 R&B 리듬을 통합했다.
1978년과 1979년 사이의 짧은 4중주 기간을 제외하고, 웨더 리포트는 항상 드러머와 타악기 연주자를 모두 포함했다. 밴드는 결성된 지 처음 8년 동안 고정적인 드러머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자코 파스토리우스가 1978년에 피터 어스킨을 영입하는 데 도움을 주기 전까지 1년에 한 명 정도의 드러머가 바뀌었다. 어스킨과 오마르 하킴은 웨더 리포트와 2년 이상 함께 연주한 유일한 드러머였다.
4. 구성원
웨더 리포트는 1970년부터 1986년까지 활동한 미국의 재즈 퓨전 밴드이다. 밴드 결성 초기부터 조 자비눌과 웨인 쇼터는 밴드의 핵심 멤버로 활동했다. 베이스와 드럼, 퍼커션 연주자는 여러 차례 교체되었는데, 시기별 라인업은 아래 표와 같다.
연도 | 키보드 | 색소폰 | 베이스 | 드럼 | 퍼커션 |
---|---|---|---|---|---|
1971년 | 조 자비눌 | 웨인 쇼터 | 미로슬라프 비토우스 | 알폰스 무존 | 돔 움 로망 |
1972년 | 에릭 그라바트 | ||||
1973년 | 그레그 에리코 | ||||
1974년 | 알폰소 존슨 | 대릴 브라운, 이슈마엘 윌번, 스킵 하든 | 없음 | ||
1975년 | 체스터 톰슨 | 알렉스 아쿠냐 | |||
1976년 ~ 1977년 | 자코 파스토리우스 | 알렉스 아쿠냐 | 마놀로 바드레나 | ||
1978년 | 피터 어스킨 | 없음 | |||
1979년 | |||||
1980년 ~ 1981년 | 로버트 토마스 주니어 | ||||
1982년 | 빅터 베일리 | 오마르 하킴 | 호세 로시 | ||
1983년 | |||||
1984년 ~ 1986년 | 미노 시넬루 |
4. 1. 정규 구성원
이미지 | 이름 | 활동 연도 | 악기 | Release 기여 |
---|---|---|---|---|
조 자비눌 | 1970–1987 | 모든 발매 | ||
웨인 쇼터 | 1970–1986 | |||
미로슬라프 비토우스 | 1970–1973 | 어쿠스틱 및 일렉트릭 베이스 | 웨더 리포트(1971)부터 미스테리어스 트래블러(1974)까지 | |
![]() | 알폰스 무존 | 1970–1972 | 웨더 리포트 (1971) | |
바바라 버턴 | 1970–1971 | 타악기 | 웨더 리포트 (1971) | |
돈 알리아스 | 타악기 | |||
에이르투 모레이라 | 1971 | 타악기 | 웨더 리포트 (1971) | |
돔 움 로망 | 1971–1974 | 타악기 | 라이브 인 도쿄 (1972)부터 미스테리어스 트래블러(1974)까지 | |
에릭 그라바트 | 1972–1973 | 드럼 | ||
앤드루 화이트 | 1972–1973 | |||
헐셸 드웰링햄 | 1972–1973 | 드럼 | 스위트나이터 (1973) | |
무루가 부커 | 타악기 | |||
그렉 에리코 | 1973 | 드럼 | ||
알폰소 존슨 | 1973–1976 | |||
이스마엘 윌번 | 1973–1974 | 드럼 | 미스테리어스 트래블러 (1974) | |
대릴 브라운 | ||||
알리리오 리마 | 1974–1975 | 타악기 | 일 스피닌 (1975) | |
척 베이즈모어 | 1974 | 드럼 | ||
레온 "은두구" 챈클러 | 1974–1975 | 일 스피닌 (1975) | ||
체스터 톰슨 | ||||
알렉스 아쿠냐 | 1975–1978 | |||
자코 파스토리우스 | 1976–1982 | |||
나다 마이클 월든 | 1976 | 드럼 | 블랙 마켓 (1976) | |
마놀로 바드레나 | 1977–1978 | |||
피터 어스킨 | ||||
로버트 토마스 주니어 | 타악기 | |||
빅터 베일리 | 1982–1987 | 일렉트릭 베이스 | rowspan="2" | | |
오마르 하킴 | 1982–1986 | |||
호세 로시 | 1982–1984 | |||
미노 시넬루 | 1984–1986 | |||
존 스코필드 | 1986 | 전기 기타 | 없음 | |
스티브 칸 | 1986–1987 |
4. 2. 주요 게스트 구성원
이미지 | 이름 | 활동 연도 | 악기 | Release 기여 |
---|---|---|---|---|
![]() | 조 자비눌 | 1970–1987 | 전기 및 어쿠스틱 피아노, 신시사이저, 오르간, 타악기, 기타 | 모든 발매 |
![]() | 웨인 쇼터 | 1970–1986 | 소프라노 및 테너 색소폰, 리릭콘, 타악기 | |
![]() | 미로슬라프 비투스 | 1970–1973 | 어쿠스틱 및 일렉트릭 베이스 | 웨더 리포트(1971)부터 미스테리어스 트래블러(1974)까지 |
알폰스 무존 | 1970–1972 | 드럼, 보컬 | 웨더 리포트 (1971) | |
바바라 버턴 | 1970–1971 | 타악기 | ||
돈 알리아스 | 1970–1971, 1975–1977 | 타악기 | ||
![]() | 에이르투 모레이라 | 1971 | 타악기 | 웨더 리포트 (1971) |
![]() | 돔 움 로망 | 1971–1974 | 타악기 | 라이브 인 도쿄 (1972)부터 미스테리어스 트래블러(1974)까지 |
에릭 그라바트 | 1972–1973 | 드럼 | ||
앤드루 화이트 | 1972–1973 | 잉글리시 호른, 일렉트릭 베이스 | ||
헐셸 드웰링햄 | 1972–1973 | 드럼 | 스위트나이터 (1973) | |
![]() | 무루가 부커 | 타악기 | ||
![]() | 그렉 에리코 | 1973 | 드럼 | |
![]() | 알폰소 존슨 | 1973–1976 | 일렉트릭 베이스, 채프먼 스틱 | |
이스마엘 윌번 | 1973–1974 | 드럼 | 미스테리어스 트래블러 (1974) | |
대릴 브라운 | ||||
알리리오 리마 | 1974–1975 | 타악기 | 테일 스피닌 (1975) | |
척 베이즈모어 | 1974 | 드럼 | ||
레온 "은두구" 챈클러 | 1974–1975 | 테일 스피닌 (1975) | ||
![]() | 체스터 톰슨 | 1975–1976 | ||
![]() | 알렉스 아쿠냐 | 1975–1978 | 드럼, 타악기 | |
![]() | 자코 파스토리우스 | 1976–1982 | 일렉트릭 베이스, 드럼, 타악기 | |
![]() | 나다 마이클 월든 | 1976 | 드럼 | 블랙 마켓 (1976) |
마놀로 바드레나 | 1977–1978 | 타악기, 보컬 | ||
![]() | 피터 어스킨 | 1978–1982, 1986–1987 | 드럼, 타악기 | |
![]() | 로버트 토마스 주니어 | 1980–1982 | 타악기 | |
![]() | 빅터 베일리 | 1982–1987 | 일렉트릭 베이스 | rowspan="2" | |
![]() | 오마르 하킴 | 1982–1986 | 드럼, 타악기, 기타 | |
호세 로시 | 1982–1984 | 타악기, 콘서티나 | ||
![]() | 미노 시넬루 | 1984–1986 | 타악기, 보컬, 어쿠스틱 기타 | |
![]() | 존 스코필드 | 1986 | 전기 기타 | 없음 |
![]() | 스티브 칸 | 1986–1987 |
- 알피 사이러스 - 보컬
- 앤드루 화이트 - 베이스, E 혼
- 바바라 버튼 - 퍼커션
- 바비 맥퍼린 - 보컬
- 캐논볼 애덜리 - 알토 색소폰
- 칼 앤더슨 - 보컬
- 카를로스 "오메가" 카베리니 - 보컬
- 카를로스 산타나 - 기타
- 채프먼 로버츠 - 보컬
- 칙 코리아 - 일렉트릭 피아노
- 콜린 코일 - 보컬
- 대릴 브라운 - 드럼
- 대릴 피네시 - 보컬
- 데이브 홀랜드 - 어쿠스틱 베이스
- 디 디 벨슨 - 보컬
- 데니즈 윌리엄스 - 보컬
- 돈 앨리어스 - 퍼커션
- 에리히 자비누르 - 퍼커션
- 그레그 에리코 - 드럼
- 허비 행콕 - 일렉트릭 피아노
- 허셜 드웰링햄 - 드럼
- 휴버트 로즈 - 플루트
- 잭 디조넷 - 드럼
- 존 맥래플린 - 기타
- 존 루시엔 - 보컬
- 조쉬 아암스트롱 - 보컬
- 맨해튼 트랜스퍼 - 보컬
- 모리스 화이트 - 보컬
- 마룬고 - Israeli Jar Drum
- 마바 반스 - 보컬
- 마일스 데이비스 - 트럼펫
- 무루가 부커 - 퍼커션
- 나라다 마이클 월든 - 드럼
- 냇 애덜리 - 코넷
- 랄프 타우너 - 12현 기타
- 레이 바레토 - 퍼커션
- 로이 매커디 - 드럼
- 시다 개럿 - 보컬
- 스킵 해든 - 드럼
- 소니 샤록 - 기타
- 스티브 갯 - 드럼
- 토니 윌리엄스 - 드럼
- 월터 부커 - 어쿠스틱 베이스
- 웨스트 로스앤젤레스 크리스찬 아카데미 어린이 합창단 - 보컬
- 윌머 와이즈 - D 트럼펫, 피콜로 트럼펫
- 욜란데 바반 - 보컬
5. 음반 목록
웨더 리포트는 1971년부터 1986년까지 활동하면서 다양한 음반을 발표했다.
2002년에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다양한 멤버 구성으로 녹음된 빈티지 라이브 녹음이 담긴 더블 CD 앨범 ''라이브 앤 언릴리즈드''가 발매되었다. 2006년 9월에는 콜롬비아/레거시에서 웨더 리포트 박스 세트 ''포어캐스트 투모로우''를 발매했는데, 여기에는 이전에 발매되었던 자료(1970년~1985년, ''This is This!'' 제외)로 구성된 3개의 CD와 1978년 9월 28일 독일 오펜바흐 공연(에르스킨과 파스토리우스 참여) 전체를 담은 DVD가 포함되어 있다. 1976년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 공연 DVD 영상(파스토리우스, 아쿠나, 바드레나가 참여한 헤비 웨더 라인업)도 공개되었으며, 콜롬비아/레거시는 1984년 ''Live in Japan'' 콘서트 DVD도 재발매했다.
2011년, 자비눌 재단은 독립 레이블과 협력하여 이전에 공개되지 않았던 웨더 리포트 라이브 쇼 40주년 기념 3부작을 발매했다. 3월에는 ''Live in Berlin 1975''가 바이닐과 CD/DVD 세트로, 6월에는 ''Live in Offenbach 1978'' DVD가 미공개 공연 전체를 담은 더블 CD와 함께 재발매되었으며, 10월에는 ''Live in Cologne 1983''이 DVD와 더블 CD로 발매되었다.
앨범 타이틀 | 원제 | 발매년도 | 종류 |
---|---|---|---|
포어캐스트 투모로우 | Forecast: Tomorrow | 2006년 | 3CD+DVD |
5. 1. 스튜디오 앨범
연도 | 음반 |
---|---|
1971년 | Weather Report |
1972년 | I Sing the Body Electric |
1973년 | 스위트나이터 |
1974년 | 미스테리어스 트래블러 |
1975년 | 테일 스피닌 |
1976년 | Black Market |
1977년 | Heavy Weather |
1978년 | Mr. Gone |
1980년 | Night Passage |
1982년 | Weather Report |
1983년 | Procession |
1984년 | Domino Theory |
1985년 | Sportin' Life |
1986년 | 디스 이스 디스! |
5. 2. 라이브 앨범
(「Black Market」수록)(「Teen Town」수록)